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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보고 읽고 쓰기 2025. 4. 9. 01:33

     

     

    출판사 도서 증정

     

    우리 삶은 수많은 갈등과 타협의 연속이다. 하나의 자아만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초점으로 그려낸 단아하고 깔끔한 이야기는 진실의 파편일 뿐이다.
    그 자체로 거짓은 아닐지 몰라도 복잡다단한 진실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저절로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한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139-140p)

     

    예술작품은 모두가 픽션이고 픽션은 속이 텅 빈 껍데기다. 라이프캐스팅처럼.
    어떤 오브젝트든 그 껍데기 안쪽은 어둠으로 가득 찬 허공이다.
    그곳에 빛을 비추고 비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사람들은 독자/관람자/해석자다.
    그 공간은 그들에 의해 채워졌다가 이내 다시 비워진다. (143p)




     

    인상적이라 널리 알려진 많은 문구처럼 진위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는 보르헤스의 유언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희랍어 시간>의 도입부에도 나온다.  

    이 문구를 가져온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는 책에 대한 책이다. 

    책의 미로 안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칼로 지나간 흔적을 섬세하게 표시하기도 하지만, 책의 미로에 매혹되어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책 한 권을 읽기도 벅찬데 이렇게 책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은 안에 나온 텍스트를 다 미리 읽어놔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물론 이 책은 지적인 탐구에 중점이 찍혀있고 책의 안내에 따라 공부를 할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작품의 깊은 곳으로 안내하는 초대장"(37p)이다. 각 장마다 이 책이 어떤 이야기인지 짧게 설명하고 있어 읽지 않은 책이더라도 이해에 문제가 없다. 읽지 않았다면 이 책의 내용을 가이드 삼아 후에 읽어도 된다. 이미 읽은 것이라면 나와 다른 저자의 렌즈를 통해 새롭게 읽고 즐기면 된다. 

     

     

    이렇게 다른 책을 다룰 때는 어떤 책을 선정했는지, 왜 선정했는지가 내용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문학과 비문학, 문학에서의 '주류와 주변 지역'의 작품, 19세기부터 오늘날이라고 볼 수 있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글을 다루고 있다. 목차를 훑어보고, 프롤로그를 읽어보면 얼마나 세심하게 저자가 작품을 고르고 골랐을지 상상이 간다. 작품이 완전무결하고 완벽하게 만족스러워서 다루는 것은 아니다. 비판하는 지점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무엇이 그렇게 매혹적이기에 작가가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읽고도 새로움을 발견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는지 느껴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한 방법이겠다.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다는 작가의 말에 따라 나의 경우는, 먼저 읽어보기를 권한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를 읽은 후, 내가 이전에 읽은 책, 읽다만 책, 읽어본 적 없는 책 순서대로 읽었다. 

     

    이 책 이전에 이미 읽어 본 책

    한강 <채식주의자>

    프란츠 카프카 <소송> 

    장폴 사르트르 <구토>

    버지니아 울프 <올랜도>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알베르 카뮈 <이방인>

    어슐러 k 르 귄 <어둠의 왼손>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

    샌드라 길버트, 수전 구바 <다락방의 미친 여자>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읽다만 책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조지 엘리엇 <미들 마치> 

    허먼 멜빌 <모비 딕>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과 아이히만>

    읽어본 적 없는 책

    이사벨 아옌데 <영혼의 집>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도시와 개들>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자크 모노 <우연과 필연>

    도리스 레싱 <금색 공책>

    엘린 식스, 카트린 클레망 <새로 태어난 여성>

    한강 <희랍어 시간>

    윌리엄 포크너 <소리와 분노>

     

     

    한 챕터가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내키는 대로, 소제목에 이끌리는 대로 읽어도 좋겠지만 한 번 다 읽어보고 나니 저자가 추천한 대로 언어학 측면에서 다루고 있는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 시작하는 방식을 역시 추천하고 싶다. 

     

     

     

    어린아이가 공룡 시기, 자동차 시기를 통과하듯이, 동화책과 어린이 전집이라는 많이들 지나오는 독서 시기를 지나 나는 sf소설과 추리 소설에서, 삼국지와 순정만화책으로, 그다음 현대시로 정신없이 헤쳐 나오며 양껏 읽었다. 중구난방이더라도 읽으면서 내 나름의 읽는 방법과 읽어낼 힘을 길렀지만 그렇다고 해서 텍스트를 파악하는 아주 최적의 도구를 갖고 있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 남들은 읽는지, 이 길 말고 다른 방법은 없는지 갈증이 클 때, 작가의 이전 작품인 <문학의 죽음에 대한 소문과 진실>을 통해 어떻게 하면 문학을 더 잘 이해할지 도움을 받았던 터라 이번 책에 대한 기대가 컸다. 

     

     

    기대감을 충분히 채워줬다.

     

     

    책을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읽었다는 저자처럼 이 책을 여러 번 읽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또 책장에 두고 꺼내 읽을 일이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추천합니다.

    - 고전이라고 부르는 책을 어떤 책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막막한 사람, 당연히 어떻게 읽을지도 모르겠고, 잠만 오는 사람

    - 읽었는데 왜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사람

    - 작품이 좋긴 좋았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던 사람

     

     

    예술을 감상할 때 작가의 전기적 사실을 알고,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적 배경을 아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너무 흔하게 들어서 당연하다고까지 여겨진다. 하지만 실제 작품을 만났을 때 어떻게 연결 지어야 하는지는 알 수 없는 경험을 한 번쯤 해본 적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작품과 독자 사이에 놓인 칼을 넘도록 돕겠다는 저자를 따라가면 그 방법의 지도를 함께 읽을 수 있다. 

     

     

    어떤 책은 몰입이 잘 되고, 다른 어떤 것은 잘 읽히지 않는다. 느낌은 너무 막연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탓하는 건 번역이다. 그러다 더 궁금해하면 북클럽으로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만 답을 찾지 못하는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느낀 점을 추상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으니 의사소통은 더욱 어렵다. 이 책을 읽다보면 어렴풋하게 혹은 직관적으로,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넘겼던 것들의 이름을 얻게 된다. 큰 구조부터 이야기 속 요소와 장치나 방식과 상징까지! 

     

    부조리라는 단어의 의미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의미를 찾고 질서를 통해 안정감을 획득하려는 인간이 비합리적이고 무의미해 보이는 카오스적 세계와 충돌하면서 생기는 욕지기(현타) 같은 것이다. (49-50p)


    부조리에 관한 여러 해석을 읽었지만 '현타' 단어를 보자 웃음이 나면서 아주 직관적으로 이해가 갔다. 세계를 균열하는 책을 다룬다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마냥 무겁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개인적으로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다룬 장이 제일 흥미로웠다. 글이 쓰인 방식과 소재인 책을 다루는 방법이 전체를 읽어야 의미가 있다고 느껴서 이렇게만 달아둔다. 

     

     

     

    좋은 책은 멈춰서 생각하게 하고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고 싶게 한다. (그것이 글을 쓰는 일이든, 산책을 나가게 하든, 달려 나가 이 책 이야기하자고 권하든) 이 책을 읽고 사두고 안 읽었던 책(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꺼내서 머리맡에 두고, 서점에 가서 책(금색 공책)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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